영국 톡파원 강유나편!
런던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옥스퍼드셔 우드스톡을 방문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1위.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리더 1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맞서 싸워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죠.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적은 편지를 보내면 처칠의 집으로 배달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을정도였습니다.
첫 번째로 향하는 곳은?
윈스턴 처칠이 태어난 장소는 블레넘 궁전입니다.
처칠의 생애를 만나 볼 첫번 째 장소는?
하지만 불행했던 유년 시절, 아버지는 정치 생활로 바빴고, 처칠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는 태어나서 세 번 뿐이었다고해요. 그리고 어머니는 사교계의 명사죠. 춤을 추천 제녀 제롬은 무리한 춤사위로 처칠을 팔삭둥이로 낳았다는 설도 있죠. 밝지만은 않았던 처칠의 가정환경.
처칠은 의외로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칭찬이라곤 없는 생활기록부, 유럽 생기부는 빈말은 절대 없다고 해요. 실제로 낙제의 연속이었던 학창 시절,
기병조차 3수 끝에 입학을 했죠. 처칠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게 신의 한 수 였습니다.
그렇게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한 처칠. 포로로 잡힌 처칠의 사진도 있어요.
이동 중 보어인들의 공격을 받아 포로로 잡힌 처칠, 하지만 곧 수용소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영국으로 귀국해 전쟁 영웅이 된 처칠.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써 영국 전역에 퍼진 그의 이야기. 그렇게 인기를 얻게 된 처칠. 이 일을 계기로 1900년 총선에 출마하게 됩니다. 26살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하여 탄탄대로를 걷게 된 처칠, 그는 점차 군인에서 정치인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1941년 캐나다 의회에서 연설 후 촬영한 사진인데 계속해서 시가를 피우자 사진기사가 시가를 빼앗은 후 찍은 사진이라고 해요.
당시 정치인이었던 처칠은 인상쓴 사진은 자신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다시 한 번 촬영을 했죠.
깊은 인상과 함께 영국 5파운드 지폐에도 새겨진 사진은 왼쪽 사진이에요.
처칠의 성장과정을 알게 된 블레넘 궁전투어.
이번엔 2차 세계 대전 당시 처칠이 전시 내각을 이끌던 장소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66세에 총리로 취임한 처칠, 프랑스를 포함한 우방국들이 함락되고 나치와 전면전을 앞둔 전쟁의 소용돌이 속, 영국의 구원자로 처칠이 선택받은 이유는 1933년 독일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 오스트리아를 흡수 합병하고 군비를 증강하며 전쟁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움직임을 간과한 주변국, 설마 또 전쟁을 일으키겠어? 히틀러가 그 정도 미친 인간은 아니다. 오판한 거에요.
히틀러의 행보를 주시하던 처칠.
협정을 위해 뮌헨에 모인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정상. 주데텐란트를 양도 받는 대신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는 조건이었죠. 협정문과 함께 돌아온 체임벌린.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1940년 5월 총리로 치임한 윈스턴 처칠. 처칠 취임 전 유럽에 파견되어 있던 영국 30만 병사.
퇴각을 거듭하며 덩케르크까지 밀려난 연합군. 총리가 된 처칠의 첫번째 과제.
독일의 대규모 기갑부대에 포위된 연합군을 구출하는 것.
처칠은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군함선, 민간 선박, 귀족들의 요트 등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한 대규모 철수 작전입니다.
약 34만 명의 병사를 구출했죠. 처칠이 모든 작전을 지휘한 워 룸.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워 룸의 내부는 어떨까요?
입장료는 한화로 약 45000원입니다. 지하는 방공호에요. 은밀한 공간이었던 만큼 어둡고 폐쇄된 느낌.
처칠과 장관, 장군들의 회의 장소로 1940년 10월 공습으로 관저 다우닝가 10번지가 훼손됩니다. 이후 정기적으로 내각 전쟁실을 사용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100회 이상 회의가 열린 곳입니다. 중간에 보이는 나무 의자가 처칠이 늘 앉던 의자입니다.
내각 전쟁실에서 최초의 내각 회의가 5시에 개회됩니다.
1940년 10월 5일 내각 회의가 열리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소수에게만 허락된 일급비밀 공간입니다. 여러 대의 전화기가 보여주는 긴박한 전시 상황,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지도들도 있어요. 핀으로 뚫어놓은 구멍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호송대의 움직임이 담긴 핀 자국. 어느 한 곳 빠짐없이 빼곡히 새겨진 전쟁의 흔적.
처칠의 경우 런던이 공습당해도 숨지 않아요. 런던의 피해 현장을 직접 방문합니다.
바로 처칠이 만든 구호입니다.
처칠의 호텔방을 찾아온 루스벨트, 목욕 후 옷도 못 입은 처칠과 대면하게 됩니다. 이에 처칠은 영국은 감출 것이 없음을 어필합니다. 결국 미국의 원조를 받는 데 성공하죠.
무기대여법 lend-lease
미국이 2차 세계 대전 동안 연합국에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지원할 수 있게 만든 법입니다.
하지만 이미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 당시의 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계기가 됩니다.
워 룸에 마련된 처칠 박물관에는 시그니처 포즈가 있는데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느낄 수 있던 워 룸. 마지막 장소로 웨스트민스터 궁으로 이동합니다. 영국 정치의 심장부죠.
1045년 영국 주요 왕실 거주지로 건축을 합니다. 현재는 중요한 국가 행사를 치를 때 사용합니다. 상, 하원 국회의사당으로 영국 정치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죠.
오랜 역사를 품은 웅장한 공간, 홀 가운데에 글씨가 새겨진 동판이 바닥에 있어요.
1965년 세상을 떠난 윈스턴 처칠, 왕족이 아닌데 민간인 최초로 국장을 치뤘죠. 안치 기간 동안 32만 명이 방문해 처칠의 죽음을 애도했죠. 여왕과 왕실 일가가 직접 참여한 장례식.
윈스턴 처칠의 생애를 함게 돌아본 시간.
출처: 톡파원 2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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